백악아래 터,
조선의 궁궐이 되다
1890
청와대 권역의 등장
청와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에 있습니다. 이곳은 고려 시대의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1067년(고려 문종 21) 지금의 서울인 양주가 남쪽의 수도를 뜻하는 ‘남경’으로 승격되면서 이곳에 임시 궁궐인 남경 행궁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악 아래 넓은 터
고려에 이어 건국된 조선은 풍수지리설을 통해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주산인 백악산 아래 경복궁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청와대가 있는 신무문(神武門) 밖 북쪽 지역’은 왕실의 제사와 함께 왕과 신하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인 회맹제(會盟祭)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 한양도성도 ]
1770년대, 삼성미술관 리움
이곳에서는 왕실의 제사나 회맹제뿐만 아니라 군대 관련 행사와 같은 의식도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회맹제는 조선 왕조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데, '회맹단(會盟團)'이라는 장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 취미대 ]
18세기(정선), 국립중앙박물관
『명종실록』 6권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회맹제(會盟祭)를 지냈다.
경복궁 중건으로 궁궐 영역이 되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1865년(고종 2)에 고쳐 짓는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신무문 밖 북쪽으로 새로운 건물들을 짓고, 담장도 북악산 중턱까지 쌓으면서 경복궁이 확장되었습니다.
[ 대동방여전도 ]
1861년 추정,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신무문 밖 북쪽 지역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경무대(景武臺) 영역에서는 중요한 국가 행사가 열렸 고, 경농재(慶農齋) 영역에서는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지 으며 풍년 기원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자연 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옥련정(玉蓮亭) 영역 과 궁궐을 방어하기 위한 춘생문 수궁(春生門 守宮) 영 역도 있었습니다.
[ 북궐후원도형 ]
1905~1908년 추정,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백악아래 터,
조선의 궁궐이 되다
국가 통치 공간, 경무대 영역
경무대는 ‘경복궁 신무문 밖의 큰 마당’이라는 뜻입니다. 경무대를 중심으로 문과 무를 상징하는 융문당(隆文堂) 과 융무당(隆武堂)이 있었습니다. 경무대는 조선 전기 부터 국왕과 신하들이 결속을 다지는 회맹제가 열렸던 곳인데, 현재의 녹지원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 다.
[ 융문당, 융무당(경무대) 전경 ]
1920년대 추정,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2006)
융문당과 융무당은 웅장한 팔작지붕과 넓은 월대를 갖춘 전각이었습니다. 앞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어서 대규모 행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융문당에서는 과거시험이 진행되거나 융무당에서는 군사훈련이 이루어지는 등, 문과 무를 포함하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이 열렸습니다.
[경복궁 융문당 정면]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친경 공간, 경농재 영역
경농재 영역은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사를 장려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래쪽에는 팔도를 상징하는 팔도배미(八道拜眉)가 있었고 위쪽에는 경농재와 대유헌(大有軒)이 있었는데, 양정재(養正齋), 중일각(中日閣) 같은 전각들은 국왕의 통치 행위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은 농업과 통치를 연결하는 중요한 장소로, 왕실의 농업 정책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 경농재 상량문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주연집
왕의 휴식, 옥련정 영역
옥련정 영역은 신무문 밖 북쪽 깊은 위치에 있는 국왕의 휴식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오운각, 옥련정, 벽화실 등의 전각과 ‘천하제일복지’라는 샘이 있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을미사변(1895) 당시 명성황후의 시신 일부가 오운각 서쪽 봉우리 아래에 임시 매장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융문당 북쪽정자(옥련정추정) ]
건판 16794, 국립중앙박물관
『승정원일기』 고종32년 을미(1895) 11월 14일(경술) 맑음
피고 박선 등의 죄에 대해 심리하여 판결한 재판 선고서
을미사변관련 피고들에 대한 판결문에서 녹산(綠山) 아래에서 불에 탄 시신 일부를 거두어 오운각(五雲閣) 서쪽 봉우리 아래에 매장했다는 진술
궁궐 호위 공간, 춘생문 영역
경복궁의 성벽 동쪽에 있던 춘생문과 그 안쪽의 춘화문(春和門)은 궁궐을 호위하는 데 사용된 문이었습니다. 춘생문 영역에는 궁궐을 지키는 금위영 군사들이 주둔하던 수궁과 금위군직소 등이 있었습니다. 고종이 일본의 압박을 피해 경복궁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던 춘생문 사건(1895)이 이곳에서 있었습니다.
[ 춘생문 부근 궁장 ]
건판 37324,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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