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의
공간훼철
궁궐 공간의 철거
일제는 1910년 강제 병합 이전부터 국왕이 지내지 않는 궁궐의 전각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915년과 1923년의 조선물산공진회, 1929년의 조선박람회를 통해 더욱 가속화되었고, 전각의 철거는 신무문 밖 북쪽 지역으로까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 조선총독부 부지 ]
1930년대 추정. 국가기록원
그 결과 1920년대 중반까지 경무대 영역에는 융문당과 융무당 전각이 남아 있었으나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국가 행사가 열리던 넓은 마당은 운동회나 원유회, 활쏘기 대회 등과 같은 대규모 행사를 치르는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는 경무대 일대가 ‘운동장’으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 순종황제 장례식 연습장면 ]
1926, 서울역사박물관

[ 광화문통관사 배수로 개수기타공사 설계 평면도 ]
1934년,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의
공간훼철
경성(1921), 국립중앙박물관
철거의 시작, 경농재 영역
1926년 경복궁 앞에 총독부 청사가 지어지면서, 신무문 밖 북쪽 지역에서는 경농재 영역이 가장 먼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총독부의 관사단지가 지어졌습니다. 팔도배미가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총독부 관리를 위한 관사단지가 들어서면서, 지희실, 양정재, 중일각 등 주요 전각들이 방치되다가 철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경무대 파노라마 뷰 ]
건판16493(좌) + 건판16492(우), 국립중앙박물관
1939년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서면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대유헌마저 철거되었고, 경농재 영역은 흔적 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移轉(이전)하는‘⼤有軒(대유헌)’」,
『동아일보』, 1939년03월07일자 기사 2면 7단
四⼗五年(사십오년)전 건축한 고적으로 各道農事(각도농사) 를獎勵(장려) 하시던자취 경복궁 신무문 밖 경무대에 있는 대유헌이라는 건물이 이번 총독관저 신축상 옴기지 아니 할 수 없어 이제 헐려간다. 이 건물은 명치 25년인 이태왕 즉위 30년 음력 4월25일에 창건된 바로 지금으로부터 45년전에 경농재 속에다 신축된 것인데 ...(중략)... 근대에 와서는 총독부 관사로 사용하던 것인데 이 집은 삼청동 뒷산□□부근에 이전시킨다하여 ...(후략)
경무대 변화, 사라지는 전각들
조선총독부는 전각 관리 및 운영 비용을 절감한다는 이유로 융문당과 융무당 전각을 일본계 사찰에 팔아넘기고 철거했습니다. 이들 전각이 철거되면서 경무대 영역은 더 넓은 공터로 변했습니다.
「由緖(유서)깁흔녯科擧(과거)터 隆武隆⽂兩堂撤毀(융무융문양당철훼)」,
『동아일보』, 1928년08월13일자 2면1단
총독부 고적보존회에서 경비가 부족하다 하야 최근에 니르러 시내 각처에 잇는 유래 깁흔 고대 건물을 작구 헐어버리는 중인데 또다시 시내 총독부 뒤 춘당대에 잇는 융무당과 융문당을 지난 십일일부터 시내 입정정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에서 다수의 인부를 다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얏다한다.....문무 과거를 보이든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야 가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야금 적지 아니 한 감개를 일으키계 하얏다.

[ 융문당 ]
국사편찬위원회

[ 융무당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박람회 개최 장소가 된 경무대
1929년 9월, 일제는 조선박람회(1929.9.12.~10.31.)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였는데, 공터가 된 경무대 영역에 음식점 구역을 사다리꼴 모양으로 설치했습니다.
[ 조선박람회장 배치도 ]
국가기록원
이곳에 음식점 60개와 매점 70여 개가 개설되었으나, 방문객이 적어 상인들의 항의가 있었습니다.
[ 조선박람회장 전경 ]
1929, 서울역사박물관

[ 조선박람회장 조감도 ]
일제강점기, 부산시립박물관
당시 조선총독부는 박람회장이었던 경복궁과 편의시설이 있는 경무대 구역을 연결하기 위해, 경복궁 담장 위에 육교를 임시로 세우기도 했습니다.
[ 조선박람회장 배치도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의
공간훼철
조선총독 관저의 신축
1934년 9월, 경무대 일대에 조선총독 관저 신축 계획이 확정되었습니다. 조선총독 관저는 대상지와 설계안이 여러 차례 변경되고 건축비가 삭감되기도 하면서 2년간의 공사를 거쳐 1939년 9월 완공되었습니다. 관저의 지붕은 유약을 바른 청기와로 마감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청와대’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경복궁 정면에는 총독부 청사, 경무대 영역에는 조선총독 관저, 경농재 영역에는 총독부 관리들을 위한 관사단지가 들어서면서, 경복궁과 신무문 밖 북쪽 지역은 일제에 빼앗긴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 경무대 총독관저 ]
1938년 추정, 국가기록원
총독부 관사단지
총독부 관사단지는 팔도배미를 메워 조성되었습니다. 관사단지의 배치는 체계적으로 계획하여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잦은 신축, 철거, 이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광화문 통관사 배치도 ]
1925, 국가기록원

[ 관사 배치도 ]
1930년대, 국가기록원
조선총독 관저 별관
별관은 조선총독 관저보다 먼저 세워졌으며, '매화실'로 불렸습니다. 이곳은 조선총독 관저의 완공 전까지 왜성대 관저와 함께 조선총독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관저 완공 후에는 공식적인 업무나 외빈 접견 등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융문당이 있었던 위치로 추정되며, 규모는 66m² 정도였습니다.
[ 조선총독 관저 별관 ]
1966,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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