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의 시작, 경농재 영역
1926년 경복궁 앞에 총독부 청사가 지어지면서, 신무문
밖 북쪽 지역에서는 경농재 영역이 가장 먼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총독부의 관사단지가 지어졌습니다.
팔도배미가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총독부 관리를 위한
관사단지가 들어서면서, 지희실, 양정재, 중일각 등 주요
전각들이 방치되다가 철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경무대 파노라마 뷰 ]
건판16493(좌) + 건판16492(우), 국립중앙박물관
1939년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서면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대유헌마저 철거되었고, 경농재 영역은 흔적 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移轉(이전)하는‘⼤有軒(대유헌)’」,
『동아일보』, 1939년03월07일자 기사 2면 7단
四⼗五年(사십오년)전 건축한 고적으로 各道農事(각도농사) 를獎勵(장려)
하시던자취 경복궁 신무문 밖 경무대에 있는 대유헌이라는 건물이 이번 총독관저
신축상 옴기지 아니 할 수 없어 이제 헐려간다. 이 건물은 명치 25년인 이태왕 즉위
30년 음력 4월25일에 창건된 바로 지금으로부터 45년전에 경농재 속에다 신축된
것인데 ...(중략)... 근대에 와서는 총독부 관사로 사용하던 것인데 이 집은 삼청동
뒷산□□부근에 이전시킨다하여 ...(후략)
경무대 변화, 사라지는 전각들
조선총독부는 전각 관리 및 운영 비용을 절감한다는
이유로 융문당과 융무당 전각을 일본계 사찰에
팔아넘기고 철거했습니다. 이들 전각이 철거되면서
경무대 영역은 더 넓은 공터로 변했습니다.
「由緖(유서)깁흔녯科擧(과거)터 隆武隆⽂兩堂撤毀(융무융문양당철훼)」,
『동아일보』, 1928년08월13일자 2면1단
총독부 고적보존회에서 경비가 부족하다 하야 최근에 니르러 시내 각처에 잇는 유래
깁흔 고대 건물을 작구 헐어버리는 중인데 또다시 시내 총독부 뒤 춘당대에 잇는
융무당과 융문당을 지난 십일일부터 시내 입정정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에서 다수의 인부를 다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얏다한다.....문무 과거를
보이든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야 가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야금
적지 아니 한 감개를 일으키계 하얏다.
조선박람회 개최 장소가 된 경무대
1929년 9월, 일제는 조선박람회(1929.9.12.~10.31.)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였는데, 공터가 된 경무대 영역에
음식점 구역을 사다리꼴 모양으로 설치했습니다.
이곳에 음식점 60개와 매점 70여 개가 개설되었으나,
방문객이 적어 상인들의 항의가 있었습니다.
[ 조선박람회장 전경 ]
1929, 서울역사박물관
[ 조선박람회장 조감도 ]
일제강점기, 부산시립박물관
당시 조선총독부는 박람회장이었던 경복궁과
편의시설이 있는 경무대 구역을 연결하기 위해, 경복궁
담장 위에 육교를 임시로 세우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