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공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장소가 되다
다시 찾은 신무문 밖 북쪽 지역, 경무대
해방 이후 조선총독 관저는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가 이를 인계받아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서울도시계획가로망도 ]
1953, 서울역사박물관
[ 동아일보 1948년 08월 07일 ]
(전략)... 지금까지도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저택으로 사용되고 있든 백악산 밑의 소슬한 경무대가 근일중에 우리의 초대 대통령의 관저로서 명도를 받게 또 한 번 국민된 자의 기쁨과 감격을 자아내고 있다.... (중략) 그런데 이승만대통령은 하- 지 중장의 명도 의견을 쾌히 승낙하고, 늦어도 십삼일까지는 이화장에서 경무대 신저로 이사를 갈 것이라 하며, 팔월 십오일 감격의 해방 기념일에는 녹음이 울창한 경무대에서 성대한 축하 다과회를 열리라 한다. 마땅히 마지할 새 주인을 마진 경무대여 길이 앞으로 복이 있으라!
「大統領官邸(대통령 관저) 景武臺(경무대)로 決定(결정)」,
『동아일보』, 1948년 08월 07일자 2면 2단
2층으로 구성된 대통령 본관의 1층은 집무실과 서재로, 2층은 대통령과 가족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본관 건물 주변은 옛 지명에 따라 경무대라고 불렸습니다. 경무대는 본관을 증축하고 리모델링을 하는 등 여러 번의 변화를 거치며 43년 동안 6명의 대통령이 사용하였습니다.
[ 청와대 구본관 ]
1956년, 1958년, 1966년, 1977년, 1984년, 1991년
국가기록원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개칭
1960년 4‧19 혁명 이후,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경무대라는 이름이 원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새로운 이름을 짓게 되었는데, '화령대'와 '청와대'라는 이름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를 선택하면서 오늘날의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 최신서울특별시전도(最新서울特別市全圖) ]
1966,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입체전경도 ]
1962, 서울역사박물관
1890
다시 찾은 공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장소가 되다
대한민국 국가 의례의 중심 공간, 경무대
1950~1960년대에는 경무대 내에 의전용 건물이 없다 보니, 경무대 앞 넓은 마당에서 국빈을 맞이하고 상춘실의 앞뜰을 다과나 만찬 행사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 고딘디엠 베트남 대통령 경무대 방문 기념 카퍼레이드 ]
1957, 국가기록원
그래서 당시 경무대는 대통령의 관저 겸 집무 공간이자, 국빈의 의전 및 접견이 진행되는 국가 의례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 주한 노르웨이공사 경무대 방문 국민의례 ]
1959, 국가기록원
청와대 개방, 상춘객 봄나들이
1955년부터 청와대의 구본관이었던 경무대에서는 매년 국민에게 공간을 개방하는 행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벚꽃이 개화하는 봄에 경내 일부를 2~3일간 개방하였던 것입니다.
[ 청와대 정문으로 입장하는 상춘객들 ]
1963, 국가기록원
당시는 유원지나 공원 등의 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많은 사람이 경무대에서 봄나들이를 즐겼고, 1955년에는 이곳을 찾은 시민 수가 6만여 명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 청와대로 올라가는 상춘객들 ]
1963, 국가기록원
[ 청와대 앞을 지나는 상춘객들 ]
1963, 국가기록원
시민들은 다양한 꽃이 만개한 정원과 경무대 영역을 지나, 침류각과 오운정을 거쳐 상춘실에 이르는 코스를 따라 봄나들이를 즐겼습니다.
[ 침류각으로 올라가는 상춘객들 ]
1955, 국가기록원
[ 침류각으로 올라가는 상춘객들 ]
1963, 국가기록원
경무대의 봄나들이 개방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67년까지 해마다 이루어지던 연례행사였으나, 1968년 북한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1‧21 사태) 이후 장기간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대 중반까지 청와대는 국민의 방문을 엄격하게 통제하였습니다.
[ 상춘실의 앞뜰(현 녹지원)을 지나는 상춘객들 ]
1966, 국가기록원
[ 청와대를 나오는 상춘객들 ]
1966, 국가기록원
다음 콘텐츠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