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와 청와대의 요새화
1968년 1‧21 사태는 청와대를 요새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청와대 주변으로는 통행이 제한되었고,
인왕산과 북악산은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청와대 주변으로 담장이 세워지고 북악산 능선을
따라 북악스카이웨이가 건설되면서, 청와대는 닫힌
공간이 되었습니다.
[ 증축된 청와대 구본관 ]
1977, 국가기록원
청와대 비서실 확대
1‧21 사태 이후 청와대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
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조직이 확대되면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대통령 비서실의 인력은 1963년 48명에서
1970년대 말 227명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 청와대 신관(현 경호실) ]
1966년, 국가기록원
늘어나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1968년 비서별관(여민
2관)과 1972년 동별관(여민 3관)이 신축되었습니다.
아울러 구본관 건물도 동쪽으로 2동 건물이 증축되면서
활동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 비서별관(현 여민2관) ]
1971, 국가기록원
청와대 경호 기능의 강화
1963년 대통령 경호실이 처음 설치된 이후, 1‧21
사태와 8‧15 사건을 거치면서 청와대 경호 시스템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강화되었습니다. 경호실의 규모가
커지고 지위가 상승하면서 경호실 건물과 별관들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 경호실 별관(통신실) ]
1978, 국가기록원
청와대는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더욱더
요새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청와대를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 경호실(101단) ]
1978, 국가기록원
국가 행사의 중심, 영빈관
1978년, 청와대 내에 국빈 의전과 대규모 회의를 위해
영빈관이 신축되었습니다. 영빈관 1층은 대접견실로
외국 국빈을 맞이하는 공간, 2층은 대규모 오찬 및 만찬
행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 청와대 영빈관 외부전경 ]
1978, 국가기록원
이후 청와대 구본관이 아닌 영빈관에서 국가 행사가
열리게 되면서 영빈관은 명실상부한 청와대 국가
행사의 중심 공간이 되었습니다.
[ 주한 칠레대사 청와대 방문 환영식 ]
1982, 국가기록원